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뻘글] 근세 궁정사회의 천문학 후원행위와 어쩌구

과학사 강의 기말 레포트로 제출했던 글 아카이빙합니다. 순 영양가 없는 횡설수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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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물리학의 비조 요하네스 케플러
피렌체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과학혁명의 가장 위대한 영웅인 요하네스 케플러에 비견할 만한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최초로 하늘로 망원경을 돌린 갈릴레오에 의해 그전까지 유지되던 기존 우주관은 수정이 불가피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널리 알려져 있듯 갈릴레오의 발견이 즉시 사회 전체에 받아들여지던 것은 아니었으며, 갈릴레오 본인 역시 자신의 발견, 그리고 발견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코페르니쿠스주의적 관점이 쉬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졸문에서는 우선 갈릴레오를 중심으로 과학혁명 초중기의 자연철학탐구활동이 어떠한 사회 배경에서 이루어졌고 그런 배경에서의 활동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뒤 근대로 전환되는 시기 과학자들이 활동한 사회 배경이 어떻게 변화했고 그들의 활동도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갈릴레오와 메디치 대공가

갈릴레오가 달의 산맥과 크레이터, 은하수의 별무리, 목성의 네 위성과 같은, 최초의 근대적 관측천문학적 성과가 담긴 저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저술한 것은 1610년 3월이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의 지배자인 코시모 2세 데 메디치 대공에게 헌정하고 얼마지 않아 갈릴레오는 메디치 대공 가문의 궁정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임명된다.

하지만 대공가가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로 인해 갈릴레오가 얻은 국제적 명성에 감명받아 그를 궁정 학자로 서임해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갈릴레오가 메디치 대공가에 자신의 연구를 헌정하여 대공가에서 그를 어여삐 여겼다는 것은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완전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갈릴레오는 적어도 1604년부터 대학을 떠나 궁정에 예속된 학자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반복했다.1 1604년에서 1609년까지의 그의 그러한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으나, 1610년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의 성취는 그의 숙원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었다. 첫째로 1610년의 시도가 어떤 점에서 특별했기에 메디치 대공가를 감명시켰는가? 또 둘째로 갈릴레오는 왜 그렇게 궁정에 들어가 대공의 신하가 되기를 열망했는가?

갈릴레오가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 서술한 발견,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성의 네 위성의 발견을 이용해 메디치 대공가의 환심을 산 과정은 그야말로 ‘권력 획득 과정의 귀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갈릴레오가 하고많은 17세기 유럽의 궁정들 중에서 토스카나의 메디치 대공가를 선택한 것은 철저히 계산적인 행위였다. 이 점을 알기 위해서는 메디치 대공가에 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메디치 가문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활동하던, 피렌체가 명목상의 공화국이었을 시절부터 사실상의 참주로서 권력을 행사해 왔다. 1532년, 메디치 가문 출신이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자기 친척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공작으로 꽂아줌으로써 4백년 전통의 공화국은 멸망하고, 피렌체는 세습군주국이 되었다. 알레산드로의 뒤를 이어 2대 공작인 코시모는 1569년 대공의 위에 올랐고, 피렌체 공국은 토스카나 대공국이 되었다.

판금갑을 입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대공 코시모 1세가 된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피렌체의 토착 가문들을 궁정에 예속된 관료로 길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메디치 가문의 피렌체를 비롯한 토스카나 지방 지배가 정당하다, “자연스럽다”는 것을 설파하기 위한 일종의 유사 신화를 창조해냈다.2 코시모의 이름이 “우주”를 뜻하는 “코스모스”와 유사했던 점은 이런 신화 창조를 더욱 용이하게 했다. 대공국의 창건자 코시모 1세의 탄생 별자리는 염소자리였다. 이 염소는 로마 신화의 주피터가 어렸을 때 그를 길러준 님프 아말테아를 상징하는 것이며, 염소자리의 7각형을 이루는 별들은 세 가지의 신학적 덕목과 네 가지의 도덕적 덕목을 나타낸다. 염소자리 코시모 1세는 으뜸 신인 주피터와 연결되었고, 염소자리의 일곱 덕목을 신의 섭리로서 부여받았다고 주장되었다. 마침 갈릴레오가 살았을 때 토스카나 대공이던 코시모 2세는 코시모 1세와 이름도 같았을 뿐더러, 그가 태어났을 때 목성(주피터)이 바로 지평선 위에 떠오르고 있었다.3 갈릴레오는 자신이 발견한 네 개의 목성의 위성을 들먹이며 이것은 코시모 1세가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네 개의 덕목이라고 했다.4

즉, 토스카나 대공국의 메디치 대공가는 목성이라는 존재와 긴밀한 연관(비록 점성술이라는 조악한 기반 위에 세워진 신화였으나)이 있었다. 망원경을 손에 넣은 갈릴레오는 그 망원경을 들어 메디치 가문의 상징이던 목성으로 향했다. 그가 진정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증명하고 싶은 열망으로 넘쳤다면, 그는 목성이 아니라 금성을 향해 망원경을 돌려야 했다(비록 목성의 위성 역시 천동설에 대한 반례로 작용하긴 했지만). 하지만 1610년 3월에 출판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 금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갈릴레오가 금성의 위상변화를 확인한 것은 1610년 9월이었다. 즉 메디치 대공가에게 인정받는다는 행위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 절박한 문제였던 것이다. 어째서 메디치 궁정에 들어가는 것이 케플러와 함께 지동설의 쌍두마차로 일컬어지는 갈릴레오에게 지동설의 증명보다도 큰 무게를 지닌 것이었을까?


17세기 과학혁명기의 자연철학활동과 후원자

갈릴레오가 메디치 궁정에 들어가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물론 그는 내연녀와 사이에 3남매를 낳아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가장이기는 했다). 갈릴레오와 메디치 대공가 사이에서 나타나는 후원자와 과학자 사이의 관계는 천문학 혁명의 네 거두―코페르티쿠스, 튀코, 케플러, 갈릴레오―에게서 모두 나타나며, ‘과학자’를 후원자의 궁정에 매인 예속자로 치환한다면 과학혁명보다 앞선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 등까지 이러한 형태의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후원자와 예속자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학자에 대한 권력자의 투자와는 달랐다.

갈릴레오가 한 일은 이제 적절한 장비와 능력
있다면 여러분도 할 있다. 일본 천문학자 나카무라
아키마사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에 고등학교 동창
안노 히데아키의 이름을 붙였다.
근세의 궁정에서 이루어지는 후원 관계는 후원자와 예속자 사이에 상호 주고받는 관계였다. 후원자는 예속자를 후원해 줌으로써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고 명예를 증진시킬 수 있었다. 케플러가 신성로마제국 궁정을 떠난 뒤 그를 거두어 준 발렌슈타인 장군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5 메디치 대공가에 갈릴레오가 바친 ‘메디치의 별’은 메디치 가문의 토스카나 지배 서사를 지극히 강화시켜줄 수 있는 요소였으며, 이것은 단순한 “명예”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또한 명망높은 음악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10대 시절부터 궁정을 드나들었던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그러한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6 갈릴레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의 헌정사에서 목성의 위성을 논하면서, 그것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아니며, 그 전부터 이미 메디치 가문에 속해있던 “운명”이었으며, 자신은 그 “운명”과 “조우”하여 “전해 준”(눈치우스)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7 뻔뻔한 아첨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갈릴레오의 이런 태도는 단순히 메디치 가문의 정당성을 높여주기 위한 의도만은 아니었다.

과학혁명 이전의 자연에 대한 탐구는 “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받았던 취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때까지의 천문학은 천체의 물리적 성질이나 실제의 운동을 다루기보다, 천구상에서 천문학이 어느 시기에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예측하는 역상학에 가까웠다. 이러한 특성은 지극히 수학적인 것이었으며, 수학은 “기교”의 일종으로 취급받아 수학자들의 지위는 철학자보다 낮았다. 이러한 위계는 르네상스 시기 대학 내부에서 더욱 공고하여,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 하였고 수학은 그 철학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갈릴레오가 근무했던 파도바 대학에서 수학 교수의 월급은 신학 교수의 8분의 1에 불과했다.8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한 발견을 한 뒤, 숱한 비판을 받았다. 비판자들은 망원경을 이용해 본 것들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망원경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9 갈릴레오는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궁정에 속해 있던 케플러에게 자신을 지지한다는 편지를 받았고, 이를 이용해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들을 방어해낼 수 있었다.1011 그리고 그 뒤 갈릴레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케플러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았다. 이것을 1577년 대혜성을 두고 그것이 천체라고 주장한 튀코와 기상현상이라고 주장한 갈릴레오가 논쟁을 벌였을 때 케플러가 튀코의 편을 들었던 적이 있다는 데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12 하지만 그보다는 케플러의 도움이 갈릴레오에게 “결정적” 도움이 되지 못했던 점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 천문학은 하나의 “과학”으로서가 아니라(애초에 과학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도 못했고) 수학의 일종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학자” 케플러의 보증으로 “수학자”들의 비판을 꺾어낸다고 해서 갈릴레오가 원하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다. 갈릴레오는 “철학자”로의 신분상승을 희망했으며, 그것은 르네상스 시기의 대학에서는 불가능했고, 그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궁정에 들어가야 했다.13 철학자로의 신분상승은 단순히 갈릴레오 일신의 복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좀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겠으나). 신학자 및 철학자와의 격차 문제는 수학을 자연현상의 설명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막았고, 수학자가 자연현상을 설명하려 드는 것도 막았다.14 케플러가 천문학이 역상학을 벗어나 천체물리학으로 탈바꿈할 수 있게 만든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에도 그의 행성운동법칙이 갈릴레오, 데카르트를 비롯한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도 단순한 원궤도에 대한 집착보다 이런 점에서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치밀한 의도 끝에 다른 군주가 아닌 토스카나 대공 메디치 가문의 신하가 되는 데 성공했고, 우월해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자연탐구활동까지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근세의 궁정은 과학자들의 활동이 “정당화”되는 장소였고,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행위의 지위를 상승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코페르니쿠스주의가 기존 우주론을 대체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된 것은 아니었다. 토스카나 대공의 궁정 철학자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소에 끌려가야 했다. 목성과 금성의 예에서 보았듯 갈릴레오가 출세한 것과 코페르니쿠스주의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갈릴레오가 인식론적 자기 정당화를 위해 부렸던 전략은 거의 완벽한 듯 했으나, 아무리 예속자가 영광스러운 선물을 헌정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을 때도 예속자를 보호해 줄 후원자는 없다는 점을 간과했다.


근세 궁정 후원제도와 과학자의 태도 그리고 한계

궁정 후원제도는 본질적으로 예속자와 후원자가 서로 주고받는 관계였다. 예속자인 과학자의 탐구활동을 물적으로 후원해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위를 상승시켜 과학활동의 정당화에 기여해주는 것이 후원자가 예속자에게 “주는” 것이라면, 예속자가 후원자에게 “주는” 것은 후원자의 명예를 찬란히 드높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원자들은 대개 궁정에 또아리를 튼 전제군주(그 격은 교황, 황제에서 일개 공작까지 다양했으나)였기에 그 명예의 상찬은 곧 군주 권력의 정당화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 메디치 같은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켜줄 표상”을 필요로 했다.15

메디치 대공가가 갈릴레오를 철학자로 임명함으로써 그의 신분을 상승시켜준 것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예속자의 지위가 낮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갈릴레오 쪽에서도 후원자의 권력을 정당화시켜준다는 고명한 임무를 맡은 자 다운 처신을 해야 했다. 앞서 보았다시피 갈릴레오는 소위 ‘메디치의 별’들을 자신이 “발견”한 것이 아니며, 이미 “운명지어져 있던” 것을 “조우”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것은 겸양이 지나쳐 아부가 된 전형적인 사례인데, 말 그대로 갈릴레오는 자신의 “겸양”을, “미덕”을 과시해야 했다.

그리피스 천문대에 전시된 갈릴레오 망원경의 레플리카.
이건 망원경이 아니고 무쓸모한 보물이라고 우긴
갈릴레오의 주장은 다른 의미에서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갈릴레오는 자신이 메디치 가문에 헌정한 발견(자기 표현에 따르면 “조우”)은 무언가 쓸만한 유용한 것이라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16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보였던 그의 태도와 비교하면 현저히 드러난다. 갈릴레오에게 베네치아 공화국은 플랜 B도 되지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정당화” 해줄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를 필요로 했던 그에게 과두 공화정이었던 베네치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메디치 대공가의 반응이 마뜩치 않자 다음에 발견하는 별은 이탈리아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프랑스 국왕에게 헌정할 것이라고 투덜댔다.17 1609년(아직 《시데레우스 눈치우스》가 나오기 전)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대의회에 망원경을 진상했는데, 이때 그는 망원경을 군사적으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도구로서 제시했다.18 그러나 자신의 후원자로 점찍어둔 토스카나의 메디치 대공가에게 망원경을 바칠 때 그는 다른 망원경을 또 만들 수 있겠지만 자신이 위성을 발견한 그 순간 사용했던 그 망원경은 하나뿐이라면서 망원경에 대한 거의 물신적 숭배의 태도를 보인다.19 메디치 가문과의 관계에서 망원경은 “유용한” 물건이 아니라 “경이로운”(게다가 운명적인 별과의 조우를 가능케 해 준 거의 “신비적인”) 물건이었기에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발견의 경제적 무용함에 대한 강조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헌정사에서도 드러난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딱히 메디치 가문에 딱 맞는 헌정물을 팔아먹으려는 것이 아니며, 그와 대공가의 관계는 지극히 사심없는 관계라는 것을 강조했다.20 대공가는 헌정을 받아들임으로써 갈릴레오의 주장을 인정해 주었다. 지금 와서 보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유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심지어 몇 세대 전의 미켈란젤로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21 케플러가 《포도주통의 신계량법》에서 구분구적법을 활용해 통의 부피를 구할 수 있는 “유용한” 발견을 서술하기는 했으나,22 그런 작업은 통의 부피를 재는 일을 할 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지, 궁정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유용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기술자들이나 할 짓이었지, 자연의 원리를 탐구하는 철학자가 할 일이 아니었다. 궁정예술인으로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무욕함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도 상승시키고, 동시에 그런 자신을 후원해주는 후원자의 명예, 곧 권력까지 상승시켜줄 수 있었다.

갈릴레오로 대표되는 이 시기 학자들은 후원자와 위와 같은 관계를 맺었고, 그 결과 자신들의 활동의 인식론적 정당화와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겸양이 지나치다 못해 학자 본인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일마저 벌어졌다. 갈릴레오만 해도,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목성의 위성의 “발견자”가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던 “운명”을 “조우”하고 그것을 메디치 대공가에 “중재”해줬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갈릴레오 본인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목성의 네 위성이 발견되는 과정에서 갈릴레오라의 역할은 한없이 옅어진다(물론 갈릴레오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자신을 “고귀한” 철학자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메디치의 별’과 갈릴레오의 연관성은 점차 쇠퇴하여, 메디치의 별 자체는 대공가의 상징이었으나 그것이 실제의 천체로서의 의미는 거의 퇴색해 버렸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나서 이런 경향이 더욱 가속화된 것은 물론이다.23

그리고 이러한 궁정 후원제도의 가장 큰 한계는, 과학활동의 모든 목적이 후원자의 명예를 상찬하는 것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궁정이라는 폐쇄적 공간 안에서, 과학자의 과학활동은 후원자 및 다른 궁정인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이어야 했고, 그 모든 것은 후원자의 명예를 위해 바쳐졌다. 궁정은 근세 과학혁명의 영웅들이 활약할 수 있는 배경―물질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인식론적인 것이든―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후원자를 만족시켜야만 한다는 족쇄로 작용했다. 궁정의 사람들 중 과학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동료 과학자(케플러의 경우 얀 예세니우스 같은 사람)들 뿐이었다. 궁정인들은 과학자들과 과학활동을 보증하고 후원해 주기는 했지만 과학자들이 뭘 하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비애지올라는 메디치 궁정의 후원제도가 갈릴레오에게 “축복이자 저주”라고 했다.24 궁정이라는 공간 안에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과학자는 신대륙에서 진귀한 것을 가져와(“발견해”) 바치는 무부와 다를 바가 없었고, 사실상 광대에 다름아니었다. 과학자는 후원자라는 일개 개인 또는 가문에 예속되었고, “과학자 사회”는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없었다.


과학학회와 근대국가

갈릴레오의 경력은 공후 귀족 후원자와 그에 예속된 궁정예술인으로서의 과학자 사이에 나타나는 “르네상스 과학 지원 패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25 르네상스의 배경은 이탈리아와 독일 일부 일대였고, 그 덕을 본 과학혁명 초중기의 거두들 역시 이 지역에서 나왔다. 그러나 과학혁명이 진행되는 와중, 혁명의 물결은 이탈리아에서 북서유럽으로, 즉 프랑스와 영국 일대로 옮겨갔고, 케플러의 고향이던 독일은 30년전쟁으로 박살이 났다(그 와중에 케플러의 무덤마저 소실되었다).

17세기 초반에 케플러나 갈릴레오가 겪었던 후원제도가 끝물로 퇴락한 것은 아니었지만(소위 궁정과학은 18세기가 되어야 완전히 소멸했다. 뉴턴마저 하노버 공주의 신하였다),26 17세기 중반에는 그것을 대체할 만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가 죽고 불과 2년 뒤인 1644년 런던에서 존 윌킨즈가 주도해 퓨리턴 성직자, 천문학자, 의사들의 모임인 ‘철학대학’을 만들었다. 크롬웰이 찰스 1세의 목을 날리고 공화정을 수립한 뒤 윌킨즈는 옥스퍼드로 가서 ‘철학회’를 만들었다가, 1660년 찰스 2세가 왕정복고한 뒤 ‘물리수학적 실험학문의 진흥을 위한 대학’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2년 뒤 개명하여 ‘자연지식의 향상을 위한 왕립학회’의 전신이 되었다.27

물론 학회(아카데미)란 것이 이때서야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유럽 대륙에서는 16세기부터 이러한 조직들이 숱하게 생겨났었다. 하지만 과학혁명 이전 또는 초중기의 학회들은 메디치 대공가와 같은 후원자들의 비호를 받는 궁정예술인들의 조직에 가까웠다. 새로이 형성되는 학회들에서는, 학회 구성원들은 “사물을 변화시키기 위해 연대”했다. 17세기 중반 이후의 과학학회들은 개인의 부족한 부분을 집단으로서 해결하기 시작했다.28

제1대 세인트알반 자작 프랜시스 삼겹살
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베이컨은 갈릴레오가 메디치 대공가에 그랬던 것과는 달리, 지식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1663년 로버트 훅이 기초한 왕립학회 강력 역시 이러한 베이컨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강령에 따르면 왕립학회의 목적은 “자연의 사물에 도간한 지식과 모든 유용한 기술, 제조, 기계적 숙련, 엔진 및 발명을 실험에 의해 향상시키는 것”으로, 신학, 형이상학, 도덕, 정치학, 문법, 수사학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1664년 왕립학회 산하 8개 위원회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은 69명이 몰려들었던 기계 분야였다.29 1670년대에 베이컨적 경향이 줄어들고 갈릴레오적 경향이 가미되었으나, 베이컨의 영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베이컨의 “유용성”에 대한 강조는 근세를 넘어 근대의 과학활동과 과학사회에 완전히 융합해 오랫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30

갈릴레오와 메디치 대공가 사이의 관계는 다분히 개인 대 개인의 성격을 띠었다. 궁정예술인으로서의 과학자의 과학활동은 군주 개인 또는 군주 가문의 영광과 권력 정당화에 이용되었고, 과학자들은 집단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후원자를 얻기 위해 물어뜯고 싸우기도 했다. 천동설-지동설 절충설 체계의 선취권을 두고 벌어진 튀코 브라헤와 라이마루스 우르소 싸이의 추한 싸움은31 기실 그 이론을 실제로 누가 먼저 만들었느냐도 중요했지만, 프라하의 신성로마제국 황실수학자(나중에 케플러가 물려받게 되는) 자리를 누가 얻게 되느냐의 문제도 걸려 있었다. 심지어 싸움에서 패한 우르소는 사형 선고까지 받고 프라하에서 도망쳐 불우하게 죽었다.32 그러나 케플러 및 갈릴레오 이후 세대의 과학학회들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차원으로 존재했으며, 그들이 ‘후원’을 받는 대상 역시 군주 개인이 아니었다. 이후의 ‘후원’ 주체로는 다름아닌 국가가 등장했다.

문예부흥기에 유행한 오컬트인 헤르메스주의에서는
무언가의 이름을 알면 그것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
하였다. 즉 중2병 매체에서 나오는 "진명"을 생각
하면 된다. 베이컨의 사고 역시 이들과 상통했지만,
베이컨이 간 길은 이 오컬티스트들과는 정반대였다.
근세에서 근대로 시대가 바뀐 뒤에도 유럽의 군주들이 지적 명예를 위해 학회의 창설을 독려하긴 했지만,33 이제 과학적 성취는 군주 개인의 명예 증진을 통한 권력 강화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 것처럼, 과학적 성취는 곧 실질적인 국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한 과학활동의 무대에 대중이 등장했다. 궁정과학의 시대에 후원자에게 “경이”를 팔아야 했던 과학자들은 이제 대중이라는 거대한 고객을 눈앞에 두었다. 이에 따라 겉 다르고 속 다른 궁정의 예법을 따라 필요 이상의 겸양을 떨 필요도 없어졌고, 과학이 돈이 될 수 있다, 유용하다는 것을 대중에게, 그리고 국가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할 수 있게 되었다.34 즉, 과학적 발견이 군주 개인에게 헌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그리고 그 국가의 구성원 모두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발상이 시작되었다. 이는 갈릴레오를 비롯한 근세의 선각자들의 겸손하다못해 비굴한 태도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유용성에 대한 주장은, 유럽 국가들의 중앙집권화와 자본주의의 발전에 더욱 적합했다.35 그렇게 서유럽에서는 근세가 끝나가고 근대의 벽두가 밝아오고 있었다.


갈릴레오와 베이컨의 그림자

다시 갈릴레오로 돌아가면, 그렇다면 갈릴레오의 과학활동은 세대가 바뀜에 따라 아예 대체된 것일까? 갈릴레오뿐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튀코, 케플러가 수행한 활동은 단순히 후대의 학자들이 베이컨을 기둥 삼아 세운 과학의 전당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닦았을 뿐, 거기서 끝난 것일까?

근세 독일과 이탈리아의 분열상
갈릴레오와 베이컨은 분명 동시대의 유럽인들이었다(갈릴레오 생몰 1564년 ~ 1642년; 베이컨 생몰 1561년 ~ 1626년). 이 두 사람이 어떤 점에 있어 과학활동이 경제적으로 무용하다, 또는 유용하다(내지 유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그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갈릴레오는 숱한 소국들이 합종연횡을 반복하던 이탈리아 반도에 살고 있었다. 갈릴레오와 유사한 처지에서 유사한 활동을 한 케플러의 독일 땅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베이컨은 대륙에서 떨어진 영국에서 살고 있었고, 영국은 대륙의 골치 아픈 사정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었다. 영국 역시 신구교 분쟁으로 인한 내란적 상태를 겪었으나, 그 동안에도 잉글랜드 왕국이라는 정체 자체는 완전히 분열되거나 대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 치세에 해당하는 베이컨 당대에는 종교분쟁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재커바이트의 난으로 인해 나라가 여러 차례 뒤집히기는 했으나 이는 모두 베이컨이 사망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요컨대 갈릴레오의 이탈리아는 분열되어 있었고, 베이컨의 잉글랜드는 통일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때의 잉글랜드는 막 에스파냐의 갤리온 함대를 잿더미로 만들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날개를 펴기 시작하는 일출의 시대. 갈릴레오와 케플러가 활동하던 이탈리아 제(諸)공국과 신성로마제국과 비교했을 때, 잉글랜드 왕국이 “과학의 유용성”을 필요로 하고 또한 후원하는 “근대 국가”에 더 가까웠음은 자명하다.

또한 두 사람의 출신성분 역시 대조적이다. 갈릴레오는 중하위 귀족 출신으로, 대학 내 서열이 떨어지는 수학 교수였다. 역시 이 또한 케플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반면 베이컨은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고위 관료였으며, 그 자신 또한 자작 작위를 가진 높으신 분이었다. 갈릴레오는 과학활동을 하는 당사자였고, 베이컨은 외부의 여유있는 자로서 그 활동을 다소 메타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기실 베이컨은 과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근대 과학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그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실험을 직접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갈릴레오는 과학활동의 당사자로서 자신의 활동이 자연계의 진리를 찾는 숭고한 행위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낮추고 동시에 자신의 활동의 실용적 활용 가능성도 부정하였다. 반면 베이컨은 과학활동을 옆에서 보는 관료, 즉 국가권력의 집행자, 곧 국가 그 자체의 입장에서 그 활동을 관조했고, 그 활동이 부국과 제민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베이컨의 귀납과 지식 누적은 무한의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었다. 그에게 지식(‘활동’의 결과)은 인간의 행복(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이후 과학자들의 위치는 궁정에서 대중 앞으로 변화했고, 과학자 사회는 학회를 통해 조직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과학활동은 군주의 권력 정당화에 영합하던 과거를 탈피하고 과학의 유용성을 설파하며 과학은 그 자체로 국가에 의한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활동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과학이라면 마땅히 대개 유용하고 쓸모있으며, 과학을 수행하는 과학자란 사회에 이바지하는 최전선에 위치한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 때로는 그들이 국가와 민족의 중흥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등에 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 그러한 사고관에서 비롯된 홍역 역시 한국 사회를 한 차례 쓸고 지나갔던 바 있다.

오늘날의 우리가 과학의 “유용성”을 이야기할 때, 꼭 과학과 함께 끌려나오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기술”이다. 과학의 유용성을 주장할 때는 대개 “과학기술”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러한 언설이 이루어지는 것은 “과학기술”이라고 과학을 기술(소위 ‘유용’한 것이 확실한)과 함께 논하는 것이 “과학”이라고만 하는 것보다 유용성을 납득시키기에 더 확실하기 때문일 터, 단순히 “과학”이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왜 “과학기술”이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겠다. 그 설득력의 차이의 원인은 “과학”임은 분명하나 “유용”하다고 단언하기는 힘든(또는 발화자는 유용하다고 생각해도 청자를 납득시키기 어려운) 분야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갈릴레오가 천문학자였으니 천문학-물리학을 예로 들어보자. 2018년이면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거대 마젤란 망원경이 완공될 것이다. 구경 8.4 미터짜리 거울 7개를 붙여 만든 구경 25미터라는 이 무지막지한 망원경은 분해능이 0.3초에 달할 것이다. 레이저 적응광학 기술을 적용하면 시상의 효과를 한층 더 제거할 수 있고, 우리 은하 중심 방향의 두터운 먼지 띠를 적외선 대역에서 뚫고 은하중심 초대질량블랙홀 주변을 지금보다 더 세밀하게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도 놀라우며, 결과 역시 (프로젝트가 성공적이라면) 경이로울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 어디에서, 이 결과 어디에서 일반 대중과 사회에 당장의 이득이 될 가치가 창출될까? 마찬가지로 입자가속기를 돌리면 매번 전기만 잡아먹지, 거기서 어떤 이윤이 창출되지는 않는다. 힉스 입자의 존재를 확인하고 질량이 존재하는 원리를 규명했다고 해서 거기서 어떤 이윤을 얻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과학활동을 하는 과학자들의 대답은 뻔뻔하게 “그것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밝힌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과학과 기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과학기술과 사회 사이의 피드백이 강화된다고 하더라도(예컨대 무선통신을 위해 전리층이 연구된다던가, 군사목적의 해저탐사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로 대륙이동설이 판구조론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던가), 확실히 “과학”으로 간주되는 분야들이 점유하는 활동에서 비실용적인(또는 적어도 사회적으로 그렇게 평가되는) 부분은 제거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과학활동을 하는 당사자들에게 “실용”적인 부분보다도 과학의 정수라고 불리운다. 소위 “진리의 탐구”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들과 과학 공동체는 그 진리 탐구라는 목적을 방기할 수 없다. 그 거창한 목적은 비록 눈으로 볼 수 있는 이윤이 없을지라도, 과학활동이라는 행위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과학 자체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보루이기 때문이다. 갈릴레오를 비롯한 근세의 천문학자들이 일련의 군주들과 맺은 관계는 일견 비굴한 주종관계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목적은 자신들의 활동의 정당화였고, 그 정신은 오늘날의 과학활동 현장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기대학교’라는 말에 베이컨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면, ‘문리대학교’라는 말에는 갈릴레오의 발자국이 깊이 새겨져 있다.


주(註)
  1. 비애지올리, 7쪽
  2. 비애지올리, 10쪽
  3. 비애지올리, 14쪽
  4. 비애지올리, 15쪽
  5. 뵐켈, 203쪽
  6. 비애지올리, 19쪽 ~ 20쪽
  7. 비애지올리, 34쪽 ~ 35쪽
  8. 매클렐란 3세; 도른, 340쪽
  9. 퍼거슨, 394쪽
  10. 뵐켈, 118쪽
  11. 비애지올리, 38쪽
  12. 퍼거슨, 395쪽
  13. 비애지올리, 8쪽
  14. 비애지올리, 56쪽
  15. 비애지올리, 56쪽
  16. 비애지올리, 59쪽
  17. 비애지올리, 39쪽
  18. 비애지올리, 32쪽
  19. 비애지올리, 36쪽
  20. 비애지올리, 34쪽
  21. 비애지올리, 57쪽
  22. 뵐켈, 136쪽 ~ 137쪽
  23. 비애지올리, 52쪽
  24. 비애지올리, 53쪽
  25. 매클렐란 3세; 도른, 346쪽
  26. 매클렐란 3세; 도른, 344쪽
  27. 송상용, 110쪽
  28. 파라, 243쪽
  29. 송상용, 111쪽
  30. 매클렐란 3세; 도른, 377쪽
  31. 뵐켈, 67쪽 ~ 68쪽
  32. 퍼거슨, 334쪽
  33. 파라, 245쪽
  34. 파라, 267쪽
  35. 매클렐란 3세; 도른, 378쪽

참고 자료
  • 마리오 비애지올리 저, 김명진 역, 「갈릴레오, 상징 제작자」, 박민아․김영식 편, 『프리즘: 역사로 과학읽기』(서울대학교출판부, 2013년), 5 ~ 60쪽.
  • 제임스 E. 매클렐란 3세; 해럴드 도른 공저, 전대호 역,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모티브북, 2006년), 339 ~ 378쪽.
  • 퍼트리샤 파라 저, 김학영 역, 『우리가 미처 몰랐던 편집된 과학의 역사』 (21세기 북스, 2010), 제4부 「제도적 장치」, 243 ~ 321쪽.
  • 김영식; 박성래; 송상용 저, 『과학사』 (전파과학사, 1992년), 74 ~ 116쪽.
  • 갈릴레오 갈릴레이 저, 장헌역 역, 『시데레우스 눈치우스』 (승산, 2004년)
  • 제임스 뵐켈 저, 박영준 역, 『행성운동과 케플러』 (바다출판사, 2006년)
  • 키티 퍼거슨 저, 이풍 역, 『티코와 케플러』 (오상,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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