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1일 일요일

[번역] 신지의 신지에 의한 신지를 위한 보완 제11화

「응, 미사토. 저거 좀 빌려줘. 라벤더 향수.」
「괜찮아. 방에 들어가도 상관없으니까 마음껏 써.」
카츠라기 가의 저녁 식사는 늦다. 아무래도 작전부장인 내 귀가가 늦어지기 때문이다.
「응, 미사토. 저거 좀 빌려줘. 라벤더 향수.」
나는 디저트로 내놓은 레몬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급하게 씹어 넘겼다.
아이들은 저녁을 먹고 나서 연달아서 디저트까지 먹고 있다.
「괜찮아. 방에 들어가도 상관없으니까 마음껏 써.」
기후 변동으로 구할 수 없게 된 것은 많다. 진짜 생화에서 추출한 향료도 그 중 하나다.
세컨드 임팩트 전에 만들어진 귀중품을, 미사토씨가 여러 가지 의미로 소중히 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이해한다.
하지만 박정한 나에게 있어서는, 아스카의 기분을 해쳐서까지 아까워할 가치는 없다.
「당케, 미사토.」
「천만에.」
다 쓴 식기는 부엌으로.
「차 바꿔 마실래, 어때?」
「아…, 네.」
「나는 됐어.」
「…희망합니다.」
「쿠와악」
찻주전자에 더운물을 넣고 식당으로 돌아온다.
리츠코씨의 영향으로 커피당에 입당한 나는 홍차를 아무렇게나 막 만들었다. 아스카가 거절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우선 신지의 찻잔에 홍차를 따른다.
이어서 아야나미의 찻잔의 앞, 여분으로 놓아둔 머그컵에 따른다.
잠시 그대로 두었다가 아야나미의 찻잔에 홍차를 옮긴다.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머그컵에. 또 찻잔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서플러먼트(supplement; 영양제)와 고형 밸런스 영양식만 먹고 살아온 것 같은 아야나미는 조금 고양이 혀 체질(역자 주―뜨거운 걸 못 먹는 사람. 아시죠?)이었다.
네글렉트(neglect; 무시함) 등으로 인해 따뜻한 식사를 접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다.
동거를 시작했을 즈음, 식후의 차에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아 이유를 물어보니 뜨거운 것은 서투르다고 말했다.
라면 같은 것은 조금씩 공기에 노출시켜 식혀 먹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스프 종류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렸던 것 같다.
식혀 먹는 방법을 가르쳐 주자 후우후우 하면서 열심히 숨을 불어대는 아야나미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빠르게 식혀 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 라는 주고받음에 아스카가 이쪽을 흘낏 봤다.
사팔눈의 의미는 기운 없는 태도일 것이다. 그것인즉,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아스카는 언뜻 봐서는 감정표현이 풍부해 보인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연기라는 것은 아스카가 감정을 감추려고 했을 때 알게 되었다.
숨기는 것도 서투르고, 과잉반응하다 보니 공격적으로 보이니까.
그 모습은 마치 새끼들이 숨어있는 굴을 막기 위해서 머리를 쑤셔 넣는 고슴도치(역자 주―원문에는 ‘호저’이다. 하지만 ‘고슴도치의 딜레마’에 맞추기 위해 고슴도치로 번역)같다. 사용할 생각도 없는 가시가, 있지도 않은 외부의 적을 무의미하게 위협한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자신을 연출하고, 이를 악물고 그 모습을 겉꾸민다. 그것이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라는 소녀였다.

「에~! 나, 미사토가 직접 만들어 주는 게 좋아.」
「그러고 보니, 아스카…짱한테 부탁이 있거든?」
「뭔데?」
시선만 이쪽을 향한 것은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라는 뜻일 테다.
「디저트 사는 거 말야, 아스카…짱이 좀 해줄 수 있을까 해서.」
「에~! 나, 미사토가 직접 만들어 주는 게 좋아.」
찻잔에 내 몫을 따른다.
류큐 가라스(琉球ガラス; 오키나와에서 만든 유리 공예품. 색채가 선명하고 질감이 풍미 있다고 한다)로 만든 카페오레 볼(bol a café au lait; 카페오레 마실 때 쓰는 그릇)은 아스카가 오키나와에서 사 온 선물이다. 마음대로 사도를 섬멸한 벌이라면서 쉽게 넘겨주지 않았지만.
부부 찻종 같은 대소 한 쌍으로, 작은 쪽을 아스카가 쓰고 있다.
아스카 본인의 마음에도 드는 것 같고, 2개라면 꼭 좋으니까. 라는 이유로 골랐지만, 당연하다는 듯 엉뚱한 지레짐작을 한 것 같다.
받을 때, 다른 뜻은 없어. 라고 다짐받아 버렸다.
「지금도 매일 직접 만드는 건 아니야.」
베이비 체어 위에 펜펜이 보이지 않는다. 차의 교체는 필요 없을 것이다.
「가게에서 사 오기도 하고, 오늘만 해도 마야…짱이 준 거야.」
홍차를 한 모금.
「대충 하는 거 반대야!」
「그랬어?」
그랬다. 세 아이의 식사는 물론이고 디저트까지 만들고 있다는 걸 알자 수제 디저트를 내게 주었던 것이다.
「대충 하는 거 반대야!」
「그렇게 말하니 괴롭지만, 요즘 너무 바빠.」
바쁘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식사 준비를 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디저트 만들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이 많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디저트를 직접 만들고 있었던 것은, 그게 아이들에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스위트(sweet)를 눈앞에서 만들어 주면, 아이들은 마법을 본 것처럼 동경한다.
주로 아야나미를 위한 대책으로 시작했지만 부모 자식의 상호 접촉을 모른다는 점에서는 세 명 모두 다를 바가 없고, 아이들도 날마다의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을 감히 그만두는 것은 아스카에게 몇 가지 「일」(お仕事)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일럿으로서의 임무(任務)가 아닌, 가정 내에서의 일손 돕기를 경험시켜주고 싶었다.
「직무 태만이네.」
부모의 사정을 헤아려 가정의 운영에 참가하는 것도 아이의 성장에 필요하다.
「내가 너희들을 맡고 있는 건 그게 일이기 때문은 아니야?」
한숨 돌리고, 노트 퍼스컴을 꺼내서 시동을 걸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스카 역시 부모의 정에 굶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지도 아야나미도 끼어들지 않는 것은 아스카에게 동의하기 때문에 아스카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선출의 근거는?」
아니, 아야나미는 불만인가? 아스카가 지명된 것에 불복하는 건가.
「아스카…짱이 과자 가게라든지는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
조금 외로운 것 같다.
나를 재촉하는 비프음(beep; 컴퓨터의 삑삑 소리)에 ID와 패스워드를 입력.
「퍼스트에게는 과중한 일이라는 거야.」
사소한 데서 자기 과시욕을 자극받은 것 같은 아스카가 만족스럽게 상체를 뒤로 젖혀 뽐냈다.
「물론 매일 그럴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어. 휴일하고 그 다음 날은 내가 만들어 줄게.」
다음 단계로 옮기기 위한 발판. 그런 의미도 있다. 만들어만 주던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사게 되는 것을 경험하면, 그 다음에는 함께 만들기라는 선택지도 있을 수 있다.
세 명 중 누군가가 과자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말해주는 날이 오기를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고양이 발바닥 모양 소프트웨어를 호출해서 파일을 연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내면의 문제가 정리된 것 같은 아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럼 부탁해.」

네이네이. 하면서 손을 털고 의자에 기대는 아스카.

불만이 있으면 언제라도 불평을 일방적으로 내뱉는 아스카니까, 생기 없는 모습은 멋쩍음을 숨기려는 것일 것이다.

…왜 이호기 파일럿은 천만에요라고 말하지 않는 거야. 라는 아야나미의 군소리는 무시되는 것 같다.

「…레이짱도, 먹고 싶은 과자가 있으면 아스카…짱한테 얘기해. 새로 가게를 찾았다거나 하면 가르쳐 줘.」
「…네.」

얼굴을 올리고 대답한 아야나미가 드문드문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자기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는 아야나미는 아스카의 보좌라는 위치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숫자의 무리에 새로 수치를 더해간다.
「그래서, 미사토는 조금 전부터 뭐하고 있는 거야?」
「이거? 모두의 영양 관리야.」
내밀어 보인 노트 퍼스컴에는 네 사람의 섭취 칼로리나 영양 성분, 소비 칼로리 등이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흐응? 에바의 파일럿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지.」
자기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보단 아스카가 눈썹을 찡그렸다.
「왜 내 이력이 여기 오고 나서부터 것밖에 없는 거야?」
「그거, 내가 프라이빗에 부쳐서 관리하는 거야.」
「네르프 일이 아닌 거야?」

습관적으로 영양 관리를 시작하게 된 것은 학생 시절의 일이다.
당시 여성의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오만날 빈혈이라든지 생리불순이라든지 고생하고 있던 나는 그 대책으로 리츠코씨가 짜 준 관리 소프트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 최신 버전. 마기 발타자르(역자 주―아카기 나오코의 어머니로서의 인격이 이식)의 서포트를 받는 뛰어난 물건.
그런 일은 멜키오르(역자 주―과학자로서의 인격이 이식) 쪽이 어울리는데. 라고 불평하는 리츠코씨를 달래서 바로 요 전날 전환했다.
뭐, 캐스퍼(역자 주―여자로서의 인격이 이식)보다는 좋겠지만. 이라고 악담을 하기에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레몬 케이크로 입을 막아 버렸다.
화를 낼 줄 알았던 마야씨가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이상했지만.

「아니야. 성장기인 너희를 맡고 있는 보호자로서 당연히 필요한 거야.」
이 소프트웨어 덕분에 근 8년간 체형을 유지하고 있고, 그 연장으로서 아이들의 영양 관리를 하는 것은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다.
게다가 마기의 서포트를 받게 되고부터는 휴대 단말기의 전자수첩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입력의 수고도 확실히 줄었다.
「거짓말 마셔. 이렇게까지 하는 부모가 어디 있어.」
아스카는 네 사람 모두 필요한 칼로리나 영양 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다.
「다들 바쁘니까. 게다가 다른 아이들이 너희들만큼 엄밀하게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머 그거 봐. 결국 우리가 파일럿이니까 그렇게 하는 거 아냐.」
「달라. 너희들이 파일럿이라서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이 파일럿이기 때문에, 기왕 할 거면 엄밀함이 필요한 것일 뿐이야.」
아이들이 파일럿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영양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보호자로서 필요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하는 것이다. 단지 이 아이들이 파일럿이니까, 보통의 아이들보다 신경 써 줘야 하는 것이다.
「내 걸 한번 열어봐? 8년 전부터 해오고 있는 습관이야.」

좀 실제적으로는, 아이들의 영양 관리는 사령부에 대한 퍼포먼스적 측면이 강했다.
귀중한 칠드런을 맡고 있는 이상, 감독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어필할 필요가 있다.
의료부에 제공해 주어서 검진 항목을 줄이거나 식단의 어드바이스를 받을 수 있다는 메리트도 있지만.
하지만, 에바의 파일럿이기 때문에 해주고 있다. 는 식으로 아이들을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펜펜 것도 있어.」
옆쪽에서 엿보고 있던 아야나미가 데이터를 찾아낸 모양이다. 그건 찾아내는 걸 원하지 않았을지도.
「어쩐지 펭귄한테 힘이 들어가 있는 거 같아.」
그건 눈의 착각이다. 인간의 것하고는 파라메터(parameter; 매개변수)가 다른 것이다.
원래 이 세상에 온천펭귄의 영양 관리 소프트웨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펜펜을 떠맡았을 때 함께 양도된 임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해서 리츠코씨에게 부탁해 대충 만들어 낸 것이다. 인터페이스가 엉성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입력 항목이 달라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저애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신종인 데다, 실험동물이잖아. 영양관리가 큰일이야.
게다가 날 생선은 먹지 않고 꼭 구워서 먹으니까 비타민도 부족할 테고.」
한숨.
아장아장 하는 느낌으로 걸어온 펜펜이 베이비 체어에 기어올랐다. 아무래도 선반까지 영양 서플러먼트를 가지러 다녀온 것 같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병에서 캡슐렛(カプレット; 캡슐과capsule+알약tablet으로, 알약의 부드러움과 캡슐의 빠른 효과를 모두 가진 약) 을 골라내서 꺼내더니 물도 없이 삼켰다. 통째로 삼키기는 펭귄의 특기다.
「생선만 좀 날것으로 먹어줘도, 적어도 비타민 C 보급은 걱정 없는데.」
「…펜펜. 좋고 싫다…. 안 돼.」
아야나미.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
「오히려 너희들보다 어려워.」
조금 쓴웃음.
노트 퍼스컴을 끌어당겨서 지금의 비타민 섭취를 계상(計上; 계산하여 올림)했다.
「천하의 칠드런보다 펭귄 쪽에 수고를 들이고 있다는 거네.」
역시 화가 난 건가?
왼손을 쑥 내밀어서는 펜펜의 부리 아래쪽을 긁어주고 있다.
자기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을 긁어주는 것은 동물에 있어서는 지복이다(역자 주―《이기적 유전자》 308쪽 ~ 참조… 물론 농담).
행복한 웃음을 띤 온천펭귄이 기쁜 듯이 아스카의 손에 부리를 비벼댔다.
「뭐, 펭귄 상대로 무슨 말을 해 봤자 소용 없잖아.」
펭귄조차…. 그 군소리의 다음은 공기속에 녹아 들리지 않는다.

펜펜의 반응을 살피면서 비어있는 왼손은 이제 그 후두부에 닿았다.
「우리가 파일럿이 아니라도 해 주는 거야?」
기뻐하는 온천펭귄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아스카로서는 감정을 숨기는 능숙한 방법이다.
「물론이야.
파일럿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파일럿인지 아닌지는 두 번째, 세 번째 문제야.」
그것마저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칠드런이기 때문에 맡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에바와 관계된 불행을 조금이라도 줄여 주고 싶다는 생각에 거짓은 없는데,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건 조금 괴롭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칠드런을 모두 데리고 살림을 차린다니 설득력 없는데, 뭐 됐어.
그거, 나도 액세스할 수 있게 해 줘.」
「…저도.」
「공유 스페이스에 “카츠라기” 폴더가 있어. 패스워드는 “kazoku”(역자 주―かぞく; 가족)야.」
노골적인 패스워드에 당황한 아스카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린 결과, 자기 옆에서 희생양을 찾아냈다.
「바보신지, 너 혼자서 뭘 모른다는 얼굴 하고 있는 거야!」
서치 앤 디스트로이(search & destroy)는 아스카의 신조일까?
「뭐야! 그런 건 내 마음이잖아.」
파일럿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해! 패스워드는 들었으니까 나중에 보려고 했단 말이야. …그래, 좋아 그럼. 쿠왁 쿠와악. 이렇게 입씨름을 시작했기 때문에 노트북을 덮고 욕실에 더운 물이나 받으러 가기로 했다.

때는 상하(常夏; 일년 내내 지속되는 여름),
하루로는 밤,
밤으로는 아홉 시,
아야나미는 이슬 맺히고,
아스카는 날고(역자 주―アスカ의 한자 표기가 飛鳥),
신지는, 마루 위에 엎드리고,
펜펜이 다스리시니.
모든 세상은 무사하여라.

……일까나.
(역자 주―네르프 로고 아래에 적혀 있는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의 원전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피파의 노래〉를 패러디한 것임)

****

맹장지에 노크하는 건 바보짓이다.
펑펑. 맹장지(역자 주―; 종이를 덧댄 미닫이문)에 노크하는 건 바보짓이다.
「신지군, 잠깐 괜찮아?」
『…미사토씨? 들어오세요.』
맹장지를 연다.
「한밤중에 미안해.」
침대 위에서 S-DAT(stationary head-digital audio tape; 고정식 녹음 헤드를 사용한 오디오 테이프)를 듣고 있던 것 같은 신지는, 상반신을 일으켜 이어폰을 빼냈다.
「아뇨.」
신지의 앞까지 가서 바닥에 앉았다.
「왜 그러세요?」
「내일 일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분명히 동요한 신지가 S-DAT를 떨어뜨렸다.
「내일 성묘, 마음이 내키기 않으면 무리하게 가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신지군의 기분이 우선 중요해. 어른들 형편 같은 건 나중이라도 괜찮아.」
「…제… 기분인가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성묘라고 하는 건 죽은 사람에 대한 기분의 문제야. 그러니까 본인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오히려 어머님께 실례야?」
정말로, 성묘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찌기 아버지가 했던 말도 결국은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참뜻은 무엇보다 아야나미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나나 지금의 신지가 둔감하다고 해도, 어머니의 사진만 봤다면 그 사진이 누구를 닮았다는 것쯤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역자 주―원작 15화에서, 겐도는 유이의 무덤에는 시체가 없으며, 사진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눈치를 채게 되었다고 해도, 외가쪽 친척이라고 거짓말해버리면 그만이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은 차치하고.
성묘 그 자체가 싫은 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건 유수 정책이다.
「…성묘가 싫은 건 아니에요. 그…」
신지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하지만, 아무리 시선을 움직여 봤자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 리 없고.
「…아버지를 대하기가 힘들고.」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구나?」
신지가 수긍했다.
「난 아버지를 싫어했기 때문에 신지군하고는 좀 다르지만, 기분은 알 것 같아.」
「싫어…했다고요?」
「우리 아버지는, 자기 연구, 꿈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어.
그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어. 미워하기까지 했지. 어머니나 나, 가족의 일은 상관하지 않았으니까.
주위 사람들은 섬세한 사람이라고들 했어.
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약해서, 현실에서, 우리 가족이라는 현실에서 도망치고만 있던 사람이었던 거야.
아이 같은 사람이었지.
어머니가 아버지와 헤어졌을 때도 바로 찬성했어. 어머니는 항상 울고만 있었으니까.
아버지에게는 쇼크였다지만, 그때는 자업자득이라고 비웃었어.
그런데 마지막에는 날 대신해서 죽은 거야. 세컨드 임팩트 때.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아버지를 싫어했다는 게 바로 좋아했던 게 아닐까.」
가슴의 로사리오를 만지작거렸다. 일찍이 들은 말들을 바탕으로, 미사토씨의 기억을 떠올리면, 마치 내 일처럼 가슴이 아파왔다.
내가 미사토씨에게 공감하듯이, 미사토씨도 내게 공감해 주고 있다면 마음이 든든하겠지.
「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지 않다면, 조금 일찍 가도 괜찮아?
먼저 가서 꽃만 올려두고 오면, 사령관한테도 전해질 거고.」
제안 내용을 이해한 것 같은 신지가 잠시 멍해졌다. 3년 전에 도망친 이후로 따로따로 간다는 선택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신지가 바라지 않는다면, 무리하게 대면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패런테크토미(parentectomy)라고 하는 치료법이 있다.
기관지염이나 천식, 혈관 신경성 부종 등의 심인성 질환의 대책으로 아이들을 문제가 있는 부모에게서 떼어 놓는 방법이다.
병의 원인이 될 만큼,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의 존재가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도망친다든가 도망치지 않는다든가 하는 레벨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의 신지와 아버지의 관계에 적용시키는 것은 좀 무리지만, 신지의 자립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참고하고 있다.

「…아뇨, 모처럼이니까 아버지하고 같이 갈게요.」
게다가, 어중간하게 상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이후의 상처가 커진다.


「…아뇨, 모처럼이니까 아버지하고 같이 갈게요.」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괜찮겠니?」
네. 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미사토씨의 얘기를 듣고 나니까, 살아 있는 동안 마주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미사토씨, 후회하고 계시죠. 아버지에 대해서.」
그 말이, 가슴의 상처로 미사토씨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2년동안의 마음의 미궁의 궤적.
그것은 헛된 기쁨과 자기혐오를 채워 넣고 후회로 봉한 만화경이었다.
몇 번이고 형태를 바꾸어 나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미사토씨.」
정신을 차리자 신지의 얼굴이 앞에 와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있다.
이거 재미없다. 미사토씨의 기억에 붙잡혀 또 울어버린 것 같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연색(楝色; 연한 보라색) 손수건은 다름 아닌 신지가 준 승진 축하 선물이다.
「미안해. 내가 할 수 없었던 걸 신지군이 해 주는 것 같아서, 기뻤어.」
거짓말이다. 미사토씨의 기억이라서 울었다.
그렇지만 본심이었다.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지금의 신지가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뻤다.
사실은 무서워요. 라면서 머리를 긁적이는 신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

펑펑. 맹장지에 노크하는 건 바보짓이다.
『…카츠라기 소령.』
「…레이짱? 괜찮아.」
맹장지가 열리고 베개를 안은 아야나미가 들어왔다.
원래는 노크도 응답도 없이 당돌하게 불쑥 들어오곤 했지만, 아스카에게 걸리고 나서 단숨에 섬멸…, 바로 교정되었다.
언제든지 와도 괜찮다고 카츠라기 소령은 말했는데. 라며 원망스럽게 아스카를 바라보던 아야나미가 귀여웠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먼저 담요에 들어가 있어.」

아야나미의 방에 침대를 넣어준 날, 그녀의 싱크로율은 폭락했다. 리츠코씨가 옆에서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와중에, 그날 하루 일을 반추해 보았다.
어쩌면 싶어서 귓가에 속삭여 준 뒤, 급회복한 싱크로율 때문에 리츠코씨에게 추궁을 받기도 했다.
그 이래로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아야나미가 잠자리에 슬그머니 들어왔던 것이다.

머리빗으로 빗어 내리던 머리카락을 머리망 속에 모으고 화장수를 손에 잡자 거울에 아야나미의 모습이 들어왔다.
잠자리에 자기 베개 준비를 끝내고는 다리를 모으고 앉은 채 내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레이짱. 이리 와 봐.」
말없이 다가온 아야나미를 경대 앞에 앉혔다.
입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파자마 차림.
쪽빛을 물들인 그러데이션은 목 언저리부터 백살(白殺し; 약간 탁한 하늘색)~병사(瓶覗; 엷은 쪽빛)~물파(水浅葱; 엷은 옥색)~팟잎(浅葱; 옥색)~달개비풀(露草) 같은 식으로 조금씩 색깔이 진해지고, 옷자락에 이르기까지 박표(薄縹; 엷은 남색)~표(; 남색)~쪽빛(; 진한 남색)~납호(納戸; 회색 섞인 남색)~감색(紺と色)으로 익어간다. 파란색 거농(裾濃; 아래로 갈수록 짙어지는 선염법 염색)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염색 방법을 현대풍으로 어레인지한 것이다.(역자 주―이 색깔들은 모두 일본의 전통색입니다)
이 시대에 감색 염색 직인은 적기 때문에 찾기까지 고생 좀 했지만, 충분히 보람있을 정도로 잘 어울린다.
이 파자마처럼 아야나미 자신도 색을 거듭해주다면 기쁘겠지만.

물론 이 잠옷을 입힐 때도 말썽이 있었다.
평상복이라든지 여러 가지를 사 주려고 데리고 간 백화점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침구류 판매장에 시선을 돌린 아야나미는, 그게 좋으니까. 라고 한 마디 중얼거리고는 입을 닫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야나미는 AT 필드라도 친 것처럼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전략적 후퇴를 도모했다.
아마 무엇인가 각인(Imprinting; 동물 새끼 등이 자신과 처음 접한 동물을 어미로 여기는 현상)된 것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야나미에게 내가 물려준 그 파자마가(역자 주―제6화 참조) 중요한 물건이 되었던 것이다. 라이너스의 담요(Linus's blanket; 안정 담요security blanket를 달리 부르는 말. 아이가 매달리는 애착의 대상. 《피너츠》의 라이너스 반 펠트가 항상 담요를 들고 다니는 데서 유래한 용어)처럼.

얽매이는 물건이 생겼다는 것은 아이의 성장에 있어 나쁜 것은 아니다. 자아가 싹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단지, 날마다 빨아야 하는 파자마에 얽매이는 것은 좀 불편하다. 빨았을 때 바꿔 입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해서 오늘 욕실에서 재전투를 성공했던 것이다.
이 날을 위해서 준비한 전용 언령(言霊; 고대에, 말에 깃들어 있다고 믿어진 신비한 힘) 결전병기 「매일 저녁마다 입으면 옷이 닳을 거야」는 아야나미의 AT 필드를 피부까지 분쇄시켰다.
잇달아서 내보낸 「열심히 찾았어, …레이짱한테 어울릴 거 같은 파자마.」는 프로그 나이프보다 매끄럽게 아야나미의 코어를 꿰뚫은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준비해 둔 잠옷을 장비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손에 빗을 들고, 색소가 없는 아야나미의 머리카락을 빗질한다.
태양광 아래에서는 연한 팟잎 색(浅葱色; 옥색과 비슷한, …팟잎이라니 하츠네 미쿠를 떠올리면 될까요)으로 잘못 보이기도 하는 아야나미의 머리카락은 따뜻한 색감의 형광등 아래에서는 희미한 창포색(菖蒲色)으로 보였다.
「…어째서.」
「이렇게 해서 머리카락 끝을 가지런하게 해둬야 머리카락이 아프지 않아.」
「…그래도 바로 흐트러지는데.」
「그러게. 하지만 조금 다른 게 쌓이면 큰 차이가 되거든.」
「…알 것 같아.」
머리를 빗어주는 중에도 상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대기 때문에 방심할 수가 없다.
슥슥,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이카리군이, 어머니 같은 느낌이 난다고…해서.」
「…이카리군이, 어머니 같은 느낌이 난다고…해서.」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역자 주―원작 15화 참조. 현재 이 팬픽에서 하루 전 시점. 아스카가 미사토에게 라벤더 향수를 빌려달라고 한 날이기도 하다. 그 다음 날, 즉 오늘이 아스카와 신지가 키스하는 날).
「…주부가 어울린다는 뜻…인지.」

「그래. 그래서… 레이짱은 어떻게 생각했어?」
내가 미소짓는 것을 거울너머로 본 아야나미가 뺨을 붉혔다.
「…뺨이 뜨거워졌어. 나, 부끄러워하는 거? …어째서 부끄러운 거야?」
그 때는 분명히 화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전과는 달라진 걸까.
「…그건, 자기 장래를 상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래?」
「응. 남자아이에게 끌리고, 서로 이어져서, 아이도 낳고. 여자아이의 행복의 하나네.」
슥슥,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자기가 그렇게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없니?」
「…모르겠어.」
슥슥,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건, 그 아이와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그 상대가 자신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아야나미의 몸이 굳어졌다.
「…이카리군은, 나와 그렇게 되고 싶은 거?」
거울너머로 쓴웃음을 본 것인지 캐물어 온다.
나 역시 그랬지만, 지금의 신지도 무슨 진지한 의미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일 리 없다. 단순히 화제가 끊어지자 한 가벼운 이야기일 뿐이다.
「신지군은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 거야.
하지만, …레이짱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구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해.」
「…바람직?」
「여자아이로서 매력적인 거야.」
뻣뻣해진 몸을 풀어주듯이, 나머지 한쪽 손으로 어깨를 만져 준다.
「…매력적.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동경.
     이성을 끌어당기는 요소를 가지는 것.
 …이성. 서로 달라서 이끌리는 것.
     결합되어 보충되는 한 쌍.
 …한 쌍. 사람의 인연의 한 형태.
     보완된 이성.
     사람의 단위.
     다음 세대를 낳는 편성.
이성에게 요구되는 것.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즐거움. 선택받는 기쁨. 보완되는 기쁨.
그래. 나, 요구되었던 것이 기쁘구나.」
드문드문 중얼거리던 아야나미가 시선을 올렸다.
산발한 머리칼을 빗는 행동을 눈으로 쫓는다.
슥슥, 머리카락을 빗는 소리만이 방을 채운다.

「…나는, 카츠라기 소령이 어머니라는 느낌이 들어. …어째서?」
거울너머로 이쪽의 모습을 살피던 아야나미가 몰래 시선을 맞추어 온다.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야.」
「…우리는 카츠라기 소령의 아이들이 아닌데.」
아니야. 라고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혈연 같은 건 관계없어.
아이가 있고,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어. 그게 부모 자식이야.
부모를 뜻하는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木) 위에 서서(立) 살펴본다(見)는, 그런 글자야. 그건,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야.
반대로, 피가 연결되어 있어도 부모 자식이 아닐 수도 있어. 부모라는 것에는 자각과 노력이 필요해.
내 아버지나 신지군의 아버지는 그런 자각이 없는 부모지.」
왼손으로 가슴에 늘어진 로사리오를 만지작거렸다.
「…이카리 사령관은 부모가 아니에요?」
「그러게. 아이를 살펴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야.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단단하지만, 그건 사람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인연이고, 무엇보다 긴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지는 인연이니까.
그것을 줄 수 없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야.」
미사토씨의 기억, 나의 기억. 엇갈린 십자가 형태를 이룬 닻이 왼손 안에서 무겁다.
깊은 곳으로 끌어당겨지자 떠올라서 도망치려는 거품과 같이 눈물을 짜낼 것만 같다.
「…나, 이카리군에게 말했었어. 사령관의 아들인데, 아버지의 일을 믿을 수 없는 거냐고(역자 주―원작 5화 참조. 신지가 아야나미에게 싸닥션 맞은 장면).」
잘난 척 해 버렸어. 라고 하면서 보는 것은 오른손바닥.
「…나, 부러웠던 거야? 나보다 확실한 인연을, 이카리군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꽉 움켜쥐었다.
「…나, 화났던 거야? 이카리군이 그 인연을 소홀히 하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그래, 나, 질투했구나.」
무엇인가를 요구하듯이 흠칫흠칫 입을 연다.
자기 마음 속의 어두운 정념을, 아야나미는 처음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괜찮아, 아야나미.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통과하는 길이야.
아야나미의, 성장의 증거야.
「…나, 아무것도 몰랐어.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이카리군을 상처입혔어?」
떠돌아다니던 아야나미의 오른손이 로사리오를 잡고 있는 내 왼손에 닿아왔다.
십자가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글쎄, 어떨까?」
상처입지는 않았다. 단지 놀라고 이해할 수 없어서 우울해진 것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그것이 아야나미 나름의 서투른 파토스(πάθος; 일시적이고 격정적인 열정)의 발로였다는 것을. 외부를 수용해서 내면에서 만들어낸, 아야나미의 마음의 잔물결이라는 것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은 건지 모르겠어(역자 주―뭔지 다 아시죠?).」
「그런 말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끄덕. 
「그러면, 사과하면 되는 거야. 「미안해」라고. 잘못을 인정하는 말, 사죄의 말, 용서를 부탁하는 말이야.」
「…용서…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해도, 우선 사과하는 게 중요해.」
눈물을 닦아 주고, 거울 안의 아야나미에게 미소 지어 준다.
「한때의 감정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은 아니야. 그러니까 사람은 용서라는 걸 기억해.」
그게 정말로 아야나미를 향한 말이었을까?
어째선지 굳어 있던 왼손이 저절로 풀려간다.
「괜찮아. 신지군은 용서해 줄 거야.」
은으로 된 로사리오가 소리 나게 미끄러져 내렸다.
「만약,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도 한 때의 감정이야. 그게 신지군의 전부는 아니니까.」
손바닥에 새겨지듯 남은 십자가의 자국. 비록 지금은 사라지지 않았더라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그 때는, …레이짱. 네가 용서해 주는 거야.」
…네. 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야나미의 몸을 꼭 껴안았다.

****

「이제 슬슬 갈게. 일도 아직 남아 있고.」
「이제 슬슬 갈게. 일도 아직 남아 있고.」
리츠코씨가 한발 앞서 먼저 돌아갔을 때, 느닷없이 아야나미가 떠오른 것은, 그녀에게 가려 보이지 않는 위치에 꽂혀 있던 자양화의 색깔 때문일까.
옛날의 기억으로는, 이때쯤 아야나미는 아버지와 행동을 함께 하면서 얼마간 학교를 쉬고 있었다.
작전부에 제출된 계획에는 정기적인 정밀 검사라고 되어 있었지만, 건강면 관리자인 리츠코씨도 없이 누가 무엇을 검사하고 있다는 말인가?
어젯밤 아야나미가 침실에 슬그머니 돌아왔던 것이 그것과 관계없을 리 없다. 그때 눈치 챘어야 했다.
「뭘 생각하고 있어?」
온더록(역자 주―위스키에 얼음을 탄 것. 원문에는 그냥 ‘록’이라고 되어 있음. 이쪽이 맞는 듯. 원작에서도 카지는 텀블러 잔을 사용) 잔을 쨍 소리가 울리게 내려놓는 카지씨.
눈앞의 자양화를 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준 거야.」
학생 시절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 돌아오는 길. 세 명 끼리만 호텔 최상층 라운지로 3차를 갔다.
「무정하구만. 이렇게 멋진 남자가 이웃에 살고 있는데 말이야.」
TOKYO-3의 잔에 입을 댄다.
보드카 베이스에 우유와 프란젤리코(Frangelico; 개암을 원료로 한 이탈리아의 리큐어)가 두 층 쌓인다. 표면에 각종 견과류 가루로 그려지는 그림은 그때마다 다른 것 같다. 처음 잔에는 아몬드로 하트가, 두 번째는 피스타치오로 꽃이, 이번 잔에는 개암으로 별이 그려져 있다.
강한 알코올을 달콤한 맛과 고소한 맛으로 가린, 확실히 제3신동경시 같은 칵테일이다.
「엄마는 아이들이 최우선이야.」
한 모금씩 마실 때 마다 우유와 프란젤리코의 혼합 상태가 변하고, 그에 따라 입 안의 맛도 계속 바뀐다. 그것을 즐기고 있는 사이에 보드카에 섬멸 당해 뻗는다. 그런 레시피였다.
「완전히 엄마 직업이 잘 어울리는데.」
「…의외였어?」
「응.」
처음 만났을 때는 꼭 남자 같았으니까. 라면서 기울이는 잔속에서 동의하듯이 얼음이 울었다.

처음 카지씨와 만났을 때 찔렸던 것은 일찍이 미사토씨와 카지씨가 교제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사정을 잘 몰랐다고밖에 할 수 없지만, 그 모습을 볼 때까지 완전히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만약 기억하고 있었다면 카지씨와 여자로서 교제할 수 있었을까? 라고 질문 받는다면, 그런 각오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미스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때의 나는 달랐다.
남녀가 가까워지는 계기로서는 최악의 방법으로 첫 만남을 치렀기 때문이다. 역사의 버튼을 엇갈리게 만들어 버렸다고 생각해서 동요하고 고뇌하고 절망했다.
마침 우연히도 달거리가 심한 때와 겹치는 바람에 아주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한 주 내내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리츠코씨가 상태를 봐 주러 와서 겨우 회복, 최종적으로는 카지씨와의 우정도 다시 다질 수 있었지만, 이 일의 앙금은 그 뒤로도 풀리지 않은 채 나를 괴롭혀 이후의 교우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특히 독일 제3지부에 근무하고 있을 때, 한때의 지인으로는 세 번째가 되는 아스카에게 어중간한 태도를 나타내고 만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카지씨와 사귀지 않게 된 대신, 아스카와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는데.
결국 이 주박이 풀린 건 무사히 작전부장이 되고 제3신동경시에 부임하고 나서였다. 그제야 많은 옛 지인들과의 첫 대면에, 인간관계의 오차는 어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악의 만남이었어, 우리.」
「…그러게.」
다 마신 잔을 내밀면서 보이를 부른다.
예전의 카지씨의 행방을 나는 모른다. 자동 응답기의 내용과 미사토씨의 태도에서, 죽은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미사토씨가 그렇게 좋아하는 맥주를 먹지 않게 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그것뿐이 아닐까.
자리를 비웠을 때 가방에 걸어둔 마이크로 들은 대화.
『너무 관여하면 피해를 볼 거야. 친구로서의 충고.』
『진지하게 들어두지.』

…………

『카츠라기 늦네. 화장이라도 고치고 있는 건가?』
『경도에는 뭐 하러 갔다 왔어?』
『얼레? 마츠시로(松代; 나가노 현의 마을)에서 산거야, 그 기념품.』
『시치미 떼어도 소용없어. 너무 깊게 관여하면 피해를 볼 거야. 이건 친구로서의 충고.』
『진지하게 들어두지.』

…………

조금 전 자리를 비웠을 때 내 가방에 걸어둔 마이크로 들은 대화(역자 주―원작 15화에서 리츠코와 카지의 대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카지씨가 스파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상층부가 그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도.
카지씨가 죽었다면, 원인은 아마 그것일 것이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일까. 하지만.
아니, 물론 구해야 한다. 내게 있어서도 카지씨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연인이었던 미사토씨에게 있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찍이, 쓰러져 우는 미사토씨에게 아이였던 나는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것으로 위로가 된다면, 줄어들지 않아도, 몸 같은 것 얼마든지 주었어도 되었을 텐데.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던 나의 비겁함에 새삼스럽게 욕지기가 나온다.
그래서 미사토씨의 몸을 빌리고 있는 지금, 미사토씨 대신 전력을 다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비색(蘇比色; 주홍빛과 비슷한, 꼭두서니 색소에서 뽑은 일본의 전통색) 원피스는 상냥한 오렌지빛 색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맞춤 볼레로(bolero; 단추가 없고 앞이 트인 여성용 윗도리)는 깊이 있는 목적색(木賊色; 검은빛 띤 녹색. CSS 색상표 #3b7960).
하나타치바나(花橘; 귤나무 꽃의 미칭)라고도 불리는 전통적인 배색을 내 나름대로 어레인지한 것이다.
높은 힐은 잘 신지 못하지만, 오늘은 참자.
은색 로사리오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이 십자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리도 없고.
몸에 걸친 향기는 カーブチーと月桃 브랜드. 아야나미가 오키나와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향주머니는 꼭 이 코디네이터를 위해서 주문한 것 같다.
「카지…군. …나, 변했어?」
높은 힐은 잘 신지 못하지만, 오늘은 참자.
귀고리 때문에 귀가 아프지만, 그것도 참자.
「예뻐졌는데.」
추천받은 대로 사도마저 죽이는 이명을 가진 칵테일을 남김없이 비운 것은, 각오했기 때문이다.
「…넌 변하지 않았어. 생각 없이 갈팡질팡하는 게, 언제라도 없어져 버릴 것 같애.」
미사토씨가 할 수 없었던 것을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미사토씨가 몰랐던 결말을 나는 알고 있는 것이 어드밴티지가 될 것이다.
「…술, 좋아하지 않는 거 알고 있었어? 달콤한 걸로 추천해 줘서 고마워.」
조금 전 자리를 비운 진짜 이유. 1층의 프런트까지 왕복했기 때문에.
「…나, 당신의 닻이 되어줄 수 있을까?」
가까스로 해낸 13년 만의 각오.
카드 키를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계속 つづく

2006.09.19 PUBLISHED
..2006.11.02 REVISED
..2011.04.01 TRANSLATE

원문 シンジのシンジによるシンジのための補完 第拾壱話

다…다음화에서 드디어! TS물같지 않은 TS물이었던 본 작품에서 최초의 어른의 시간이!
어른의시간 어른의시간 어른의시간 어른의시간 어른의시간 어른의시간 오늘만우절

댓글 2개:

  1. 오오.. 분량이..-ㅠ-;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근데. .마지막. 대사...
    신지 녀석... 남자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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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남자가 아니고 여자의(…) 계단이죠.
      그보다 회색글씨 스크롤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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